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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천 부평 옹진 인천역사 주요 연표


원인천

01 선사시대의 원인천지역

원인천지역(남구, 남동구, 동구, 중구, 연수구)은 서해바다에 입지할 뿐 아니라 한강유역과도 연결되는 자연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생활터전이 되어 왔다. 근래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학술조사의 결과 다수의 선사유적이 확인되어 조사지역의 선사문화를 이해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는데, 조사가 거듭될수록 더욱 많은 선사유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조사지역에서는 유구(遺構)가 확인되지 않은 구석기층과, 몇몇 구석기 유물이 수습된 것 이외에는 아직 구석기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해수면 상승으로 말미암아 조사지역의 구석기 유적이 유실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신석기유적은 영종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지역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관련한 각종 학술조사를 통해 영종도일대의 선사유적이 본격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운서동의 는들유적, 삼목도Ⅰ·Ⅱ유적, 송산유적 등지에서 주거지를 비롯한 다수의 신석기 유적이 드러났다. 이것은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온 영종도를 비롯한 조사지역의 해안 일대에 폭넓은 신석기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조사지역이 선사시대 이래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문화적 토대를 형성·발전시켜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석기 문화는 내륙지역으로도 확산되어 더욱 규모가 크고 강력한 사회집단으로서 청동기시대의 문화가 형성·발전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조사지역 내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는 영종도 일대와 문학산 일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영종도의 운남동 고인돌, 운남동 중촌 유물산포지, 반길안 유물산포지 등을 비롯한 각종 유적은 이 지역에 기존의 신석기문화를 계승한 청동기의 사회집단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문학산 주변 관교동과 선학동, 문학동, 주안동 일대에서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안동 고인돌, 문학동 고인돌, 학익동 고인돌1·2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조사지역 내 유력한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추정되어 왔다.

2000년 문학 월드컵경기장 건설과 관련하여 실시한 문학산 일대의 지표·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관교동과 선학동 일대에 강력한 청동기 사회집단이 자리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었고, 그 세력범위는 향후 조사와 연구결과에 따라 보다 폭넓게 비정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특히 문학동 선사유적은 각종 문헌에서 초기백제의 도읍지 중 하나인 ‘비류(沸流)’로 비정되어온 문학산 일대의 문화적 기반을 청동기 문화와 연관지어 파악 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02 삼국시대의 원인천지역

백제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졸본부여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 형제가 남하하여 형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고 동생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후에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생활하기 어려워진 반면 위례성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비류는 병을 얻어 죽고 그 백성들은 위례에 귀속하였다고 한다.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위례성은 한강변 옛 광주군 지역이 유력하며, 미추홀은 인천 문학산성 주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인천은 곧 옛 미추홀국이다”라고 하였고,『여지도서』에도 “문학산 위가 자못 넓은데 곧 미추왕의 옛 도읍지이다”라고 하여, 미추홀국이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되어 있었고 문학산이 그 중심지였다고 전하고 있다.

앞의 설화에서 미추홀의 주민들이 위례성에 편입된 것은 비류의 세력이 온조의 세력과의 경쟁에서 밀려 쇠퇴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미추홀은 여기서 국가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백제가 이 지역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미추홀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후 한강변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이 치열해지면서 인천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 크게 부각된다. 장수왕 63년(475) 고구려가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인천지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여기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다. 고구려가 변경지방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대한 후 그 지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통치하였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고구려에서 현(縣)을 설치한 것으로 보면 백제의 자연촌락 또는 지방을 고구려 지방행정의 한 단위로 편입하여 통치의 조직화를 꾀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백제 성왕 29년(551)에 백제가 잠시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나 진흥왕 14년(553)에는 신라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신라가 이 지역을 어떻게 부르고 어떤 행정구역에 편입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편제를 개혁하여 9주 5소경 및 군현제로 정비하고 주·군·현(州·郡·縣)의 행정단위를 두었다. 이 지역에도 행정단위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한강유역을 둘러싼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은 중국과의 통교를 위한 것이었다. 백제가 중국(東晉)과 통교를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 27년(372)부터 고구려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사망한 개로왕 21년(475)까지 약 100여년간이었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배를 뛰운 포구는 옥련동의 능허대로 알려져 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능허대를 포기하고 당항성(黨項城, 남양)을 이용하여 중국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덕왕(742∼765)때에는 유교적, 중앙집권적 관료제국가로의 발전을 꾀하면서 종래의 지명을 모두 중국식 한자명으로 바꾸었는데, 이때 인천은 소성현(邵城縣)으로 바뀌고 율진군(栗津郡, 오늘날의 과천)의 영현(領縣)으로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인천은 수도 경주에서 볼 때 과천을 거쳐 도달하는 중부 서해쪽의 끝지방에 위치하였다. 삼국이 각축을 벌일 때에는 북쪽의 고구려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막혀 있어서 중국과의 교류를 꾀하려는 신라의 입장에서는 인천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었지만,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그 필요성이 축소되었다. 신라는 중국(당)으로 가기 위해 남양만의 당은포를 이용하였다.


03 고려시대의 원인지역

고려는 호족세력의 연합과 지지에 의하여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호족세력의 근거지를 지방행정제도 속으로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성하였기 때문에 지방통치는 그들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점차 중앙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에도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2년(983) 전국 12목에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고, 성종 14년에 10도제와 함께 중요한 주군에는 도단련사, 단련사, 방어사, 자사를 두었는데, 경기도의 경우 수원(水州)에 도단련사, 부평(樹州)에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현종 9년(1018)에는 대대적으로 군현제를 정비하여, 전국을 4도호부 8목과 56개 주군(州郡), 28개 진(鎭), 20개 현으로 편제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는 중층적인 성격을 지녀 속현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지방행정단위 사이에 위계가 성립된 이유는, 지방호족의 세력 여하에 따라 계층적 편성을 꾀하게 된 때문이다. 주·부·군·현과 그 밑에 촌·부곡·향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 속현(屬縣)이 더 많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지방관이 설치된 지방이 146곳, 지방관이 설치되지 않은 지방이 361곳으로 나온다. 속현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존재하였는데, 지방행정이 중앙집권체제 속에 완벽하게 장악되지 못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종 원년(1106) 이후 지속적으로 감무의 파견을 확대하여 고려 말까지 54개 속군과 120개 속현에 감무(監務)가 설치된다. 감무의 파견은 속현의 주현화를 위한 과도적인 조치였다.

통일신라의 소성현 곧 인천은 고려 현종 9년(1018)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소속되었는데, 숙종 때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곧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키고, 인종 때는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다시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다. 공양왕 2년(1390)에는 왕이 조상을 추숭하는 의미에서 칠대 어향(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올렸다. 자연도, 삼목도, 용유도가 속하였고, 당성군(唐城郡)과 재양현(載陽縣)이 속해 있었다. 속군인 당성군은 고구려의 당성군, 신라의 당은군을 말하는데, 현종 9년 수주(水州)의 속군이다가 뒤에 인주에 소속되었다. 또 속현인 재양현은 이전의 안양현(安陽縣)으로서 현종 9년에 재양현으로 칭해지고 수주(水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인주에 속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인주의 지명과 함께 경원(慶源), 매소(買召), 미추(彌鄒)의 지명도 동시에 소개되어 있다. 인주의 경우 고구려의 ‘매소’와 백제의 ‘미추’라는 전설적인 표현이 고려시대에도 크게 의식되고 있었던 점은 주목을 요한다. 고려왕실의 어향으로서 그 지위를 상승시켜온 인주가 ‘경원’이 됨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04 조선시대의 원인천지역

조선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의 개정이 이루어져 통일신라 이후 발전되어 온 군현제가 비로소 전국적으로 확립되었다. 군현제의 정비방향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속현의 주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점에서 조선초기에도 완벽한 군현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군현 모두에 지방수령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된 것은 분명하다.

군현의 등급도 지방세력권을 감안했던 고려 때와는 달리 지역의 역사와 호구(戶口)및 전결(田結)의 수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그리고 대도호부사, 목사 외에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 군현명을 모두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하도록 하였다. 이때 주자(州字)가 붙은 군현의 명칭이 천자로 바뀐 것은 36개, 산자로 바뀐 것은 23개, 합하여 59개 군현명이 변경되었다. 인주가 인천(仁川)이 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렇게 하여 면적과 인구를 참작하여 부목군현(府牧郡縣)의 등급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실과의 관련성에 의한 읍격의 승강(陞降)은 여전히 이루어졌다.

인천은 태조 원년(1392)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에 인천군(仁川郡)으로 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인천의 이름이 등장한다. 안산을 월경하여 남양부에 이포(梨浦)부곡을 가졌으며 제물량(濟物梁), 자연도, 삼목도, 용류도, 사탄도, 무의도가 소속되어 있었다.

인천은 세조 5년(1459) 세조의 비(妃) 자성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숙종 14년(1688)에는 양주를 무대로 한 승려들의 반역이 일어날 때 승려 이(怡)가 인천출신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 숙종 23년에 다시 승격되었으며, 또 순조 12년(1812) 반역이 있어서 강등되었다가 10년 뒤 복구되었다.

군사적으로 인천도호부는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수원진관 아래에 인천, 부평이 모두 편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강화에 진무영이 설치됨으로써 처음에는 인천, 다음에는 부평이 그 전영(前營)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인천도호부는 대체로 부내면, 조동면,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 남촌면, 원우이면, 다소면, 주안면, 이포면의 10개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05 개항기·대한제국기의 원인천지역

1883년 1월 1일 인천이 개항되어 제물포에 항구와 외국인 조계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항구에서의 통상사무, 외국인의 입출국, 개항장의 내·외국인 문제 등을 관장할 행정기관으로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고 감리가 임명되었다. 감리는 인천도호부사가 겸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인천도호부는 관교동에 위치하여 제물포 개항장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개항장 사무를 아울러 관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인천도호부사는 내동 83번지에 위치한 감리서에서 양쪽 업무를 겸하였다.

1895년 윤5월 1일 시행된 지방제도에서는 종래의 8도제와 군현제를 고쳐, 23부제와 군제로 바꾸었다. 전국의 8도를 세분하여 23부로 하고 부에는 관찰사를 두었다. 전국 337개의 군에는 모두 똑같이 군수를 두었다. 당시 지방제도 개혁은 부제의 실시에 그치지 않고 337개군을 154개군으로 통폐합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지만 이서층의 동요로 시행되지 못하여, 지방제도의 개혁은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1895년의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인천지역에는 인천부가 설치되었다. 23부는 8도와 그 아래 좌우도 등을 참작하여 세분한 것인데, 인천부의 경우는 개항 이후 수도 서울의 관문이 된 인천을 중심으로 서해안 중부지역을 하나의 관찰부로 독립시킨 것이다. 인천부 산하에는 인천 김포 부평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통진의 12개군이 소속되었다. 강화유수부, 인천도호부, 부평부는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다. 개항장 인천을 중심으로 한강 서부지역의 지방제도의 구조가 대대적으로 개편된 것을 볼 수 있다.

인천부의 설치에 따라 인천감리서는 폐지되고 그 업무는 관찰부인 인천부에서 관장하였다. 관찰사가 관찰부 소속 군의 업무와 개항장의 업무까지 관장하게 됨에 따라 인천관찰부는 그 소재지를 인천 제물포로 하고 인천군의 일반행정 업무와 인천항의 통상 및 외국인 업무를 모두 담당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관찰사의 업무가 과중하고 성격이 다른 업무가 복합되어 있어, 1895년 10월 관찰사급인 지사(知事)를 별도로 두기도 했으나 곧 폐지하였다.

23부제의 실시는 갑오개혁이 후퇴함에 따라 다시 개정되었다. 1896년 8월 4일 종래의 8도 가운데 5개도를 남북으로 구분하여 13도제를 실시하고, 한성부 외에 도의 아래에 7부, 1목, 332군을 두게 된 것이다. 제주목 외에 종래의 유수부가 있던 광주, 개성, 강화와 개항장인 인천, 동래, 덕원, 경흥을 부로 하여 부윤을 두게 됨에 따라 인천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895년 개혁 때 폐지되었던 감리서를 다시 부활하였다. 관찰사와 부윤은 내부대신, 감리는 외부대신의 지휘를 받지만, 개항장의 감리는 부윤을 겸하도록 하였다. 인천항감리도 인천부윤을 겸하였다. 이후 1903년 7월 3일 개항장의 부가 군으로 강등됨에 따라 인천부도 군으로 되었다. 그러나 개항장의 감리만은 그대로 두었다.

개항기에는 인천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선정되어,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외국무역의 기지, 외국문물의 도입지, 외국군대의 침략지, 새로운 외국인 주거지로서 도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국방의 중심지였던 강화 일대는 개항을 계기로 크게 쇠퇴하고 군사적 방어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였던 해로의 의미도 크게 쇠퇴하였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이전에는 여전히 강화해협과 한강이 주요 교통로로서 기능하는 한편, 인천에서 서울로 통하는 육로로서 개항로가 개설되었지만, 1900년 경인철도의 개통 이후에는 해로와 육로의 역할은 크게 쇠퇴하였다. 명실공히 인천은 무역상, 외교상, 교통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어 한강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06 통감부시기의 원인천지역

소위 을사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06년 1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정부의 행정을 감독하고,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을 철폐하였다. 그리고 일본영사관은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하였다. 즉 1906년 1월 19일 개항장에 설치되어 있던 일본영사관을 이사청으로 바꾸어 전국에 10개의 이사청을 설치한 뒤 이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사청에서는 영사관의 업무, 개항장 감리의 업무, 그리고 기타 지방행정의 지도감독 업무를 맡았다. 인천이사청은 경기도 서부 일대, 충청도 서북부 일대, 황해도 남부 일대를 관할하였다.

한편 일본은 통감부 설치와 함께 지방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시도하였다. 1906년 4월 지방제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옛 제도를 조사하고 개편방안을 마련한 뒤 1906년 10월 1일 지방제도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군 구역을 재조정하고, 행정구역 지위의 승강을 실시하였다. 개항장 소재지의 군을 부(府)로 개칭함으로써 인천은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1906년 9월 24일 인천감리서가 폐지되고 그 업무는 인천부에 인계되었다. 인천부는 감리서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감리서의 업무는 이사청과 인천부로 갈라지면서 감리의 업무 상당 부분이 이사청으로 넘어갔다.

개항장의 확대와 개항장을 통한 국내외 무역의 활성화, 그리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거주는 이 시기 한국 중심도시의 위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전통적인 도시 가운데 쇠퇴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반면 개항장 소재지는 신도시로서 성장해 나갔다. 인천은 주지하듯이 개항장으로서 도시화의 길로 나간 도시 가운데 가장 발달된 도시를 형성해 갔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가 아니라 일본인 중심의 도시라는 점, 그것이 근대성과 침략성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07 일제강점기의 원인천지역

1910년 병합 당시 조선의 행정구역은 13도 12부 317군이었다.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의하면, 부는 일본인 거류민단의 소재지에 두게 됨으로써 거류민단이 있던 인천에도 부가 설치되었다. 통감부시기와 마찬가지로 인천부이기 때문에 종래의 제도를 계승한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종래의 인천부가 폐지되고 대신 새로운 지방제도에 의한 인천부가 설치된 것이었다. 대한제국기의 인천부윤은 해임되고 일본인이 새로운 인천부의 초대 부윤으로 임명되었다. 종래 감리서에 있던 인천부청은 폐지되고 새로운 인천부청이 이사청이 있던 일본영사관 건물로 입주하였다.

일본은 1914년 4월 1일 경성, 인천을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에 부제(府制)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이전 부군제 하의 부제와는 달리 산하에 면이 없는 지방행정의 기초 단위로서의 부이다. 종전 산하에 있던 농촌의 면을 떼어내어 이를 독립된 군으로 바꾸고 시가지만을 부로 창설한 것이다. 인천의 경우 병합 이후에도 존재하던 일본거류민단과 각국 공동거류지, 청국전관거류지를 폐지하여 그 지역을 인천부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로써 개항장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천부가 성립되고, 나머지 지역은 부천군으로 독립되었다. 인천부의 성립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본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천부에서는 독자적인 예산을 편성하고 독자적인 조례를 제정·실시하며, 또 독자적인 사업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이러한 행정적 독립은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편의와 복지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천부는 부내면과 다소면의 일부 지역만으로 축소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부평군과 합하여 부천군으로 신설되었는데,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합한 것이었다. 이때 부천군은 인천, 부평 외에 강화군의 신도, 실도, 아도, 장봉도, 남양군의 대부면과 영흥면, 그리고 인천의 영종면, 용유면, 덕적면 등을 모두 포괄하였다. 그리고 부천군의 군청은 종래 인천도호부가 있던 문학면 관교리에 두었다.

1914년의 지방제도 개혁에서는 지방행정경비의 절약을 이유로 군·면을 통폐합하여 그 수를 대폭 줄였다. 317개군은 220개군으로, 4,322개면은 2,521개면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인천부의 행정구역은 도시발전에 따라 여러 차례 확대되었다. 1920년 3월, 1921년 1월, 1936년 10월, 1940년 4월 행정구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1936년 10월 1일 문학면 일부와 다주면이 편입되었고, 1940년 4월 1일에는 문학면 일부, 서곶면, 남동면, 부내면(富內面)이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08 해방 후 오늘날의 원인천지역

해방 후 인천은 처음에는 법제적인 조치 없이 임시로 인천시가 되었다가 미군정하에서 1945년 11월 종전의 제도를 계승하여 인천부가 되었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당시의 법령과 규칙을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지방행정구역과 명칭도 일제시기의 것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1일부터 일본식 동명은 한국식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계속 인천부로 하다가,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에 따라 인천시로 고쳤다. 인천시는 경기도 관할 하에 놓였다. 이후 1963년 1월 부천군의 작약도가 인천시에 편입되었고, 1968년 1월 1일에는 구제를 실시하여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73년 소사읍이 부천부로 승격되면서 부천군은 없어지고 나머지 부천군의 각면은 김포, 시흥,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9년 1월에는 김포군 계양면, 옹진군 용유면, 영종면이 인천직할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95년 3월 1일 강화군, 김포군 검단면, 옹진군을 편입하여 오늘의 인천광역시가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