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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천 부평 옹진 인천역사 주요 연표


부평,옹진지역의 역사

01 선사시대의 부평,옹진지역

부평,옹진지역(계양구, 부평구, 서구, 옹진군)은 서해와 한강하류에 입지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생활터전이 되어 왔다. 근래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학술조사의 결과 다수의 선사유적이 확인되어 조사지역의 선사문화를 이해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는데, 조사가 거듭될수록 더욱 많은 선사유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조사지역에서는 불로동유적에서 유구(遺構)가 확인되지 않은 구석기층이 확인된 것 이외에는 아직 구석기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해수면 상승으로 말미암아 조사지역의 구석기 유적이 유실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하여 신석기유적은 옹진군의 여러 도서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있고, 백석동과 경서동 등 서구 일부지역의 유물산포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수습되어 그 부존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조사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서해 도서지역과 일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신석기 문화가 내륙지역으로 확산되어 발전함으로써 점차 청동기 문화로 발전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사지역 내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는 가현산 일대의 대곡동, 원당동지역과 계양산 일대의 동양동, 청라도 일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현산 북쪽의 대곡동에 140여기에 이르는 고인돌군이 확인되고 원당동 등 주변에서도 고인돌 혹은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계속 조사되고 있는 것은 가현산을 중심으로 하여 한강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매우 규모가 크고 강력한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라도 고인돌의 존재와 동양동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확인된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계양산 일대에도 청동기사회가 존재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또한 백아도와 덕적도 등에서도 고인돌 혹은 고인돌 추정 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에도 각종 패총을 남긴 신석기인들이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02 삼국시대의 부평,옹진지역

부평이 역사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한시대부터이다. 진국을 중심으로 한 한족(韓族)은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마한,진한,변한 등의 연맹체들이 만들어지는데, 부평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는데, 대개 부평지역은 한강유역의 부족 연맹체인 우휴모탁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부평지역을 포함한 한강유역이 역사상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등장이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각기 인천과 서울에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다시 온조집단이 비류집단을 흡수하면서 백제가 건국되었다.

비류집단이 처음 도읍한 미추홀(彌鄒忽)은 현재의 인천 문학산 일대로 비정되는데, 그 영역을 보통 사방백리(四方百里)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부평지역도 이 시기 비류백제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온조집단이 비류집단을 흡수하면서 백제가 형성된 후, 부평지역은 백제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475년 장수왕의 남진에 의해 한강유역이 고구려에 귀속될 때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주부토군(主夫吐郡)’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백제가 한북지역을 회복함에 따라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후 부평지역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668년 삼국통일 후 통일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경덕왕 16년(757)에 한화정책에 따라 부평은 ‘장제군(長堤郡)’이 되었으며, 술성현(戌城縣),김포현(金浦縣),동성현(童城縣),분진현(分津縣) 등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옹진군 북도면의 도서에도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거주가 계속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한주(漢州)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만 추정된다. 연평면의 경우에도 4세기까지는 백제, 5세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주에 소속되었으리라는 추정만이 가능하다. 백령면과 대청면은 유사한 삼국시대 동일한 생활문화권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백령도는 고구려시대 곡도(鵠島)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어 대청도와 함께 현재의 해주 일대인 한주 폭지군(瀑池郡)의 영현에 속하였고 대당 교통로의 중요 기항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덕적면과 자월면 영흥면의 도서들은 시기별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 등의 관할에 놓였으며, 고구려가 남양만 지역(현재 화성군 일대)에 당성군(唐城郡)을 두었을 때, 아마도 이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의 쟁패기에 남양 앞바다의 덕적군도는 대당 교통로의 요충지로 매우 중시되어 이를 둘러싼 각축이 치열하였는데, 삼국통일 후 신라에 귀속된 후 경덕왕 16년(757)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


03 고려시대의 부평,옹진지역

고려는 호족세력의 연합과 지지에 의하여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호족세력의 근거지를 지방행정제도 속으로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성하였기 때문에 지방통치는 그들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점차 중앙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에도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2년(983) 전국 12목에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고, 성종 14년에 10도제와 함께 중요한 주군에는 도단련사, 단련사, 방어사, 자사를 두었는데, 경기도의 경우 수원(水州)에 도단련사, 부평(樹州)에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현종 9년(1018)에는 대대적으로 군현제를 정비하여, 전국을 4도호부 8목과 56개 주군(州郡), 28개 진(鎭), 20개 현으로 편제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는 중층적인 성격을 지녀 속현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지방행정단위 사이에 위계가 성립된 이유는, 지방호족의 세력 여하에 따라 계층적 편성을 꾀하게 된 때문이다. 주·부·군·현과 그 밑에 촌·부곡·향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 속현(屬縣)이 더 많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지방관이 설치된 지방이 146곳, 지방관이 설치되지 않은 지방이 361곳으로 나온다. 속현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존재하였는데, 지방행정이 중앙집권체제 속에 완벽하게 장악되지 못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종 원년(1106) 이후 지속적으로 감무의 파견을 확대하여 고려 말까지 54개 속군과 120개 속현에 감무(監務)가 설치된다. 감무의 파견은 속현의 주현화를 위한 과도적인 조치였다.

부평은 고려 초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수주로 되었는데 수주(樹州)는 인주(仁州), 수주(水州), 강화현(江華縣)과 함께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수주는 고려전기에는 인천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성종 14년(995)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폐지하고, 현종 9년(1018) 지주사(知州使)로 고쳤다가,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로 삼고, 고종 2년(1215)에는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쳤다. 충렬왕 34년(1308) 길주목(吉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 2년(1310) 목을 폐지함에 따라 떨어뜨려 부평부(富平府)로 삼았다. 수주에는 속현이 6개 있었는데, 오늘날의 시흥, 통진의 세 곳, 양천, 김포의 세 곳 등이었다.

옹진군 북도면은 장봉도가 강화의 진강현에 속해 있었고, 시도도 매잉도(買仍島)라는 이름으로 강화현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강화도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에 소속되어 순검군(巡檢軍)이 배치되는 등 해방의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신라말에 백령도와 대청도는 중국과의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고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각축의 대상이 되었는데, 고려가 차지한 후 명칭을 백령(白翎)으로 고쳐 진(鎭)을 설치하고 현종 9년에는 진장(鎭將)을 두었다. 백령진은 해방의 거점으로 중시되어 이곳에 진사와 성곽 등 방어시설이 축조되기도 하였고 대청도와 더불어 죄인의 유배지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말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방어에 어려움이 있어 문화현(文化縣)으로 진을 옮겼다가 이내 폐지하고 장연현(長淵縣)에 편입하였다. 덕적면, 영흥면, 자월면의 도서들은 고려 초 당성군으로 명칭을 복구하였는데, 현종 9년(1018) 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후에 인주(仁州)에 귀속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고 충렬왕 16년(1290)에는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고 뒤에 다시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렬왕 34년(1308)에 다시 익주목(益州牧)이 되었는데, 충선왕 2년(1310) 목(牧)을 폐하면서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남양부에는 덕적면을 비롯하여 대부면, 영흥면, 자월면의 지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몽고침략기에는 덕적도가 황해도 주민의 피난처와 되기도 하였고 영흥도는 삼별초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소야도가 원의 유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 일대가 왜구의 침략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04 조선시대의 부평,옹진지역

부평부는 충선왕대에 개칭된 후 태종 13년까지 읍호의 승강없이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조선을 개창한 태조는 모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를 전조고사(前朝故事)에 따르겠다고 천명한 바와 같이 고려의 관제를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이다. 건국 초 지방제도는 중앙관제와 마찬가지로 일부 명칭을 변경한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고려의 편제를 답습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와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강원도(江原道),풍해도(豊海道) 등 6도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관찰사(觀察使),안렴사(按廉使) 등을 파견하고 동북면(東北面)과 서북면(西北面)에 도선무순찰사(道宣撫巡察使)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도 밑의 주,부,군,현에는 목사(牧使),부사(府使),지군사(知郡事),현령(縣令),감무(監務) 등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전면적인 관제 개편과 함께 지방제도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서북면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설치하고 전국을 유도부(留都府) 1, 부윤(府尹) 6, 대도호부(大都護府) 5, 목(牧) 20, 도호부(都護府) 74, 군(郡) 73, 현(縣) 154 등 333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었으며, 태종 16년(1416)에는 동북면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팔도제(八道制)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8도에는 각각 관찰사를 두고 그 밑의 각 읍에는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을 두었다.

이 지방제도는 주,부,군,현의 부분적인 승격 혹은 강등으로 약간의 변경이 있는 외에는 이 원칙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 부평부(富平府)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로 승격되어 대체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부평도호부는 몇차례 읍호의 승강을 겪었는데, 세종 20년(1438)에 온천을 은닉한 혐의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세종 28년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고, 연산군 11년(1505) 부평 출신 김순손(金舜孫)이 연산군의 문란한 행동을 간하다 죄인이 되자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으며, 숙종 24년(1698) 부평 출신의 최필성(崔弼成)이 장릉(章陵)에 방화한 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 숙종 33년에 환원되었다. 중종때에는 이 지역에 김포굴포가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전조창(轉漕倉)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옹진군의 북도면지역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강화에 속해 있었는데, 장봉도는 진강현에 신도와 시도 모도는 강화도호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현종 9년(1668) 강화의 진강현과 하음현이 혁파됨에 따라 장봉도를 포함한 모든 도서가 강화도호부로 귀속되었으나, 숙종 43년(1717)에 장봉도에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면서 장봉도는 교동(喬桐)의 통어영(統禦營)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 북도면 도서에는 조선 초부터 목장이 설치되었는데 이의 관리와 운영을 위하여 강화도의 주민을 이주시키기도 하여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장봉진은 조선후기에 강화 수비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19세가 말까지 존속되다가 갑오개혁에 의해 혁파되었다. 연평면 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해주목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연평지역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미 목장이 존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전기부터 목장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 주민들은 청와와 조기기 등 어획에 의존하여 생업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기는 국가의 진상품으로 이와 관련해 임경업 장군의 전설이 현재도 이어져 오고 있다.

백령면과 대청면 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모두 장연현에 속하여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광해군 1년(1608) 백령도에 군진을 설치하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파견하면서 독진(獨鎭)이 되어 대청도와 소청도를 관할하게 되었다. 한편 백령도에는 조선전기부터 목마장이 설치되어 운영되어 중앙에 군마를 공급하였는데, 숙종 32년(1706)과 영조19년(1743)에 대청도로 잠시 옮겼다가 복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염장(鹽場)이 설치되어 염세로 목마장의 운영경비를 충당하였다.

대청과 소청도는 고려말 이후 오랫동안 황폐화 되어 있었는데, 정조17년(1798) 주민 입주와 경작이 허락되면서 둔(屯)을 설치하고 임시로 별장(別將)을 두었다. 이어 정조 23년(1799) 대청과 소청을 수원부(水原府)에 편입하고 각각 진(鎭)을 설치하여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진(鎭)이 폐지됨에 따라 백령과 대청, 소청은 도장제(島長制)로 운영되었다. 덕적면 지역은 조선 초 까지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남양도호부에 소속되었던 것을 성종17년(1486) 부터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이속하였다. 이후 목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주민의 거주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황폐화되어 잠시 안산에 귀속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효종 3년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설치되면서 주민의 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숙종 34년(1708)에 덕적진(德積鎭)이 설치되어 군선(軍船)이 배치되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나, 영조 15년(1739) 혁파되었다가 이듬해 진이 복설하면서 진을 교동수영에 이속하고 수군첨절제사를 다시 파견되었다. 19세기 들어 덕적진의 병력이 크게 증강되면서 주민수도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양선의 출현과 약탈로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자월면지역은 대부분 조선시대 남양도호부에 속해 있었으나, 소홀도(召忽島)는 성종 17년(1486) 안산군으로 이속되었다가 중종 14년(1519)에 다시 남양부로 편입되는 변화가 있었다. 자월면의 도서에는 승봉도 등에 목장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으나, 고종 8년(1871) 대부진(大阜鎭)이 설치되면서 여기에 편입되었다가 얼마 후 대부진이 혁파되면서 다시 남양부에 이속되었다.

영흥면 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남양도호부에 소속되었고 규모가 큰 목마장이 영흥도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8년(1871) 5월 대부도(大阜島)에 진(鎭)이 설치되었는데, 이에 따라 영흥면 지역도 고종 22년(1885)부터는 대부진(大阜鎭) 관할에 있다가, 고종 31년(1894) 대부진이 폐지되자 다시 남양부에 속하였다.


05 개항기~일제강점기의 부평,옹진지역

1895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중앙의 기구 개혁은 물론 지방제도의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1895년 6월 18일 단행된 지방행정제도는 484년간 유지되어 온 8도제를 폐지하여 23府로 개편하고 종래의 부목군현을 폐합하여 일률적으로 군으로 하였다. 즉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337개의 군을 부에 예속시킨 것이다. 23부에는 관찰사를, 군에는 군수를 두어 감독케 하였고, 군수는 관찰사의 지휘를, 관찰사는 중앙정부의 내무대신(內務大臣)의 지휘와 감독을 받게 하였다.

이 때에 부평도호부는 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예속되었다. 인천의 행정과 사법업무를 관장하던 인천감리서가 폐지되고 감리서의 업무는 관찰부인 인천부(仁川府)가 관장하게 되었고, 부평,김포,양천,시흥,안산,과천,수원,남양,강화,교동,통진,인천 등 12개 군이 예속되었으므로, 부평군도 인천부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전통시대이래로 원인천지구보다 읍격이 높았던 부평지역의 지위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23부제는 갑오개혁의 전반적인 후퇴로 인하여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5호 「지방제도개정」에 의거, ‘13도제’가 실시됨으로써 1년여 만에 개정되었다. 이 때의 개정으로 13도와 한성부(漢城府) 그리고 도 아래에 7부 1목 332군이 설치되었다. 인천부도 인천군이 되었고, 부평군과 함께 경기도에 소속된 군이 되었다. 그 후 통감부 통치가 시작되면서 다시 지방제도가 개편되었으나 부평의 위격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인천만 인천부로 승격되었다.

일본은 1910년 10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 관제와 지방관 관제에 의하여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도의 관찰사를 장관(長官)으로 개칭하고 그 아래 부,군,면을 두었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14년 3월 1일부터 인천부의 관할구역을 개항장으로 축소시키면서, 인천부에 편입되지 못한 옛 인천군 지역, 부평군 일원, 강화군 관할의 신도(信島),시도(矢島),모도(茅島),장봉도(長峰島), 남양군(南陽郡) 소속의 대부면(大埠面)과 영흥면(靈興面)을 통합하여 부천군(富川郡)을 신설하였다.

부천군의 신설로 이제 인천군과 부평군은 사라졌으며, 군청(郡廳)은 문학면(文鶴面) 관교리(官敎里)의 옛 인천군 청사에 개설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인천의 부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부천군의 문학,남동,부내,서곶 등 4개면을 인천부에 편입시키면서 종전의 인천부역 이외에 부평군 대부분이 인천부역으로 편입되었다. 부내면 지역에는 부평출장소를, 남동면 지역에는 남동출장소를, 서곶면 지역에는 서곶출장소를 설치하였다.

북도면 지역은 갑오개혁에 의하여 장봉진이 폐진되면서 강화군 제도(諸島)에 편입되어 1913년까지 지속되다가, 1914년 강화군 제도 16개 도서 중에서 장봉도(長峰島),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등 4개 유인도와 그 부속 무인도가 부천군(富川郡)으로 편입되었다. 연평면 지역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몇차례 행정구역 개편에도 불구하고 해주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38년 해주의 부(府) 승격에 따라 벽성군(碧城郡)이 신설되면서 벽성군에 편입되었다.

백령면과 대청면 지역은 갑오개혁에 따라 진(鎭)이 폐지되고 도장제로 바뀌어 장연군에 소속되어 각각 도장이 파견되었다. 도장제는 1912년경 면제로 변경되었고 1942년에는 대청출장소가 설치되었다. 덕적면 지역은 갑오개혁으로 덕적진이 폐지되고 면 중심의 행정체제로 전환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되고 진리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자월면 지역은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홀도·대이작도·소이작도가 남양군 영흥면으로, 승봉도·선접도 등은 인천부 덕적면으로 재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모두 부천군에 귀속되었다.


06 개해방 후 오늘날의 부평,옹진지역

1945년 해방을 맞은 한반도에서는 미군정(美軍政)이 시작되어 미군정청(美軍政廳)은 1945년 10월 10일 인천부(仁川府)를 제물포시(濟物浦市)로 하였다가 10월 27일 다시 인천부로 개칭하였다.

미군정청 인천군정관 스틸맨은 11월 1일 인천부의 행정기구를 정비하여 기존의 부평,서곶,남동,문학출장소를 부평,서곶,남동,문학지청으로 개정하고, 1946년 1월 1일을 기해서 정을 동으로 바꾸었다. 또한 백령면과 대청면 지역은 1945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복구사업이 시작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인천시의 행정업무가 복잡해지자 인천시는 1956년 11월 23일 시조례 제144호 「인천시출장소 설치조례」를 개정하여 부평을 비롯한 5개 출장소 외에 중부,남부,동부,북부 등 4개의 출장소를 증설하였다.

1968년 시 행정의 확대개편과 도시계획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중구,남구,동구,북구 등 4개 구가 신설되었다. 이 때 부평지역은 인천시 북구에 해당되었고, 1968년에는 십정동이 북구에 편입되어 법정동(法定洞) 29개와 행정동(行政洞) 19개 동이 소속되었다.

한편, 부천군에 소속되어 있던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 지역은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천시는 1981년 7월 1일 직할시(直轄市)로 승격하였고, 1988년에는 북구가 서구와 북구로 분리되었다.

1995년 12월 22일 인천광역시의 출범에 따라 강화군과 김포군 검단면 전역, 그리고 화성군에 편입된 대부면을 제외한 옹진군 전역이 새롭게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고, 북구를 분리하여 남쪽에는 부평구(富平區)를, 북쪽에는 계양구(桂陽區)를 신설하였다.